2007년 10월 24일 수요일

포르토벨의 마녀 중..

카룰구스타프 융의 말에 의하면, 우리 인류가 모두 같은 샘의 물을 마셨다 한다. 그 샘음 "세상의 영혼" 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우리가 아무리 독립된 개체로 인식하고 행동한다고 해도, 우리 기억의 밑바닥에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아름다움, 춤, 신성함, 음악의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한다.

"사회" 는 그러한 이상형들이 어떻게 구체화되어야 하는지 규정하려 한다. 예를 들면 오늘날에는 마른 몸매가 미의 이상형이지만 수천 년 전 여신들의 형상은 풍만했다.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행복에 대한 규정이 존재하고 있어서 우리가 그 규정을 따르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 우리의 의식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를 거부 한다.

융은 개인의 발달 과정을 네 단계로 분류했다. 첫 단계는 "페르소나"(연극배우가 쓴 마스크, 철학적으로 이성적 본성을 가진 개별적 존재자를 의미하며, 융은 이를 인간이 세상에 드러내는 가면의 얼굴로 해석했다)이다. 이는 우리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매일 쓰는 가면이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손에 좌우되어야 하고, 나는 좋은 부모인데 정작 자식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푸념하고, 상사의 지시는 불합리하고, 모든 사람의 꿈은 일하지 않고 평생 여행이나 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에 뭔가 오류가 있음을 감지하지만, 자기 생각을 바꾸는게 두렵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머릿속에서 재빨리 지워 버린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아내고자 애쓴 끝에 '그림자'를 찾아낸다.

'그림자'라는 것은 우리의 어두운 면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해야 할지 명령한다. 우리가 '페르소나'로 부터 자유로워지려고 시도할 때, 우리 안에 빛이 밝혀지면서 우리 안의 소심함과 비열함의 거미줄들이 드러난다. 그림자는 그곳에서 우리의 발전을 가로막으려 하고. 대개의 경우 성공한다. 그러면 우리는 의문을 품기 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몇몇 사람의 자신의 거미줄과의 접전에서 살아 남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 몇 가지 흠이 있지만 나는 선한 존재이고 더 나아가고 싶어"

그 순간, '그림자'는 사라지고 '영혼'과 마주하게 된다. 융에게 '영혼'은 종교적 의미의 영혼이 아니다. 모든 지식의 원천인 "세계의 영혼"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능은 더 예리 해지고, 감정은 원초로 복귀하며, 삶에서 마주치는 표지가 논리보다 더 중요해지고, 현실에 대한 직관이 더욱 유연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것과 싸우기 시작하며, 예기치 못 했던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게 된다.

이와 같이 지속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터주게 될 때, 우리는 그 에너지를 매우 굳건하게 중심에 놓고 관장할 수 있게 된다. 융은 그 굳건한 중심을, 남자의 경우 "노현자"라 일컫고 여자의 경우 "위대한 어머니"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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