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8일 목요일

데미안 - 헤르만 헤세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리 어려웠을까?

데미안은 이렇게 시작된다. 처음에 이 문구를 읽고 '이게 무슨소리지?'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마지막 장을 덥고 나서 이 문구를 다시 봤을땐 엄청난 크기의 무게가 느껴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일찍이 그 어떠한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책을 읽으며 우리 혜승이와 익현이 생각을 많이 했다, 그들은 지금 아름답고 질서가 잡혀있는 따뜻한 세상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자신의 삶의 길을 가게 될 것이고,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외부에 빼앗겨 무기력해 질 지도 모른다. 그때 그들에게는 부모의 울타리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다만 어딘가에서 구원이 올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직선으로 움직이며 그들 직선은 어딘가에서 교차하기 마련이다.(이 대목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나온 구문이다).

여하튼 주인공인 싱클레어의 경우엔 데미안이란 구원이 나타났다. 그는 싱클레어에게 카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타인이 두려워 하는 존재, 알을 깨는 존재,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존재, 각성하는 자, 우월한 자, 과연 나는 카인일까? 그냥 휩쓸려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일까? 각성한 사람일까? 그렇다면 나는 각성하길 원할까? 아니면 현실에 안주하고 행복을 추구할까?

각성이라 함은 껍질을 깨는 것이고 모든 새가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든 껍질을 깨는것은 피나는 투쟁이다, 그 길은 험난하고 고단하며 외로울 것이다. 다만 너무나 힘이 들때는 반듯이 어디선가 다른이의 인생이 나의 인생을 너의 인생을 교차할 것이다.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그런 존재였다, 겁이 많은 소년이 있다, 그 소년은 누군가를 두려워 한다. 그렇다면 그와 그 소년 사이엔 뭔가 불편한 진실이 있다.
그 소년을 컨트롤 하는 목소리는 그 자신의 안에 있지 못하고 그 누군가에게 있다,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의 근원이다.

어떻게 이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있을까? 빵장수 야곱이란 책에는 두려움을 이렇게 쓰고 있었다. 두려움 이란 고마운 것이다, 왜냐면 두려움이란 니가 정말로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얘기 한다. "네가 제대로 된 사내녀석이 되려면 그 두려움을 떨쳐버려야만 해" 그래서 항상 올바른 일을 하고자 노력한다, 그 두려움은 나의 잘못된 부끄러운 행동을 파고든다.

소년은 자랄수록 사고도 신장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가야할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투쟁의 길이며, 추위와 고독과 어둠의 길일 것이다.

데미안은 이야기 한다. "자유 의지란 없다, 다만 자기 의지를 확고하게 그 무엇인가에 쏟으면 된다, 그러면 자기 목표에 도달 할 수 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반듯이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여러번 들어 본 말이고 아침마다 무엇인가를 갖기 위해 기도한다.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꿈을 찾기 위해 먼길을 떠나듯..여하튼 소망이 내  자신의 마음속에 온전히 들어 있을때, 정말로 내 본질이 완전히 그것으로 채워져 있을때에만 원하는 것은 얻어 진다. 나의 의지가 준비되어 있을때 기회는 주어지고 즉시 기회는 포착된다.
내가 지금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매너리즘에 빠져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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