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5일 월요일

포르도벨로의 마녀

"나는 두 가지 것을 결합할 수 있어요. 동과 정, 그리고 기쁨과 집중을 말이죠."

"서법에는 두 종류가 있소"
"첫째것은 정확하기는 하지만 영혼을 담고 있지 않소. 이 경우 아무리 뛰어난 기교를 보인다 하더라도 서체가 오로지 테크닉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단계 이후에는 글씨는 발전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할 뿐이요.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틀에 박혔다고 느끼게 되어 서예를 그만두게 되지요.

두번째 종류는 물론 뛰어난 테크닉이 필요는 하지만 무엇보다 거기에는 혼이 서려 있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글씨를 쓰는 사람이 그 글과 혼영일체가 되어야 하오. 그렇게 되면 가장 슬픈 시구들이 비극의 포장을 벗고 우리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단순한 사실을로 바뀌게 되는 것이오".

주인공 아데나가 사막에서 스승에게 서예를 배우면서 스승과의 사이에서 오고간 말이다. 위의 말이 비단 서예에만 한정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무엇에든 혼과 정성을 불어 넣는다면 그것은 사실이고 현실이 될 것이다. 이것은 수 많은 책에서 공통적으로 얘기 하고 있는 말이다.

"많은 연습을 거치고 나면, 의식했던 모든 동작이 절로 이뤄지게 됩니다. 그런 움직임들이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는 거지요.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오. 그래도 충분치 않다면 더 많이 연습하고 반복해야 합니다.

어떤 책에선가 이런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원래는 한자 어구인데 남들이 10번에 익혔으면 나는 100번을 하고 남들이 100번에 익혔다면 1000번을 하라는 구절.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쇠를 다루는걸 떠올려 봐요. 문외한의 눈에는 그저 똑같은 망치질의 연속처럼 보일 것이지만 서법을 훈련받은 자에게는 그의 망치질이 매순간 강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요, 이렇든 반복이란 늘똑같은 동작이지만 실은 언제나 다른 동작이지요.

영혼을 담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선 언제나 피를 깍는 반복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학습의 정의와 비슷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