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7일 목요일

농담 - 밀란 쿤데라

농담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민음사

감히 이제껏 읽은 책 중에 최고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기분이다. 여운이 한참동안 남아 다 읽고도 몇일간 책을 뒤적였다. 결국 인생은 농담처럼 장난처럼 아무 생각없이 한 행동이 돌이킬 수 없는 인생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결과를 초래하곤 하며, 나로 인해서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밀려가듯 쓸려가듯 흘러가며, 시대의 변화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용서해야 한다.

나는 인간의 운명을 심판하는 초고 재판소에 비치된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도저히 바로잡아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이 이미지는 나 자신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실제적이며, 그것은 결코 나의 그림자가 아니라, 나, 바로 나 자신이 내 이미지의 그림자 였다. 왜 나를 닮지 않았냐고 그 이미지를 탓 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미지와 다른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리고 이 다름은 바로 나의 십자가, 그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도 없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으로 선고받은 십자가였던 것이다.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과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은 크게 다르다고들 한다. 어째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그림자가 실제와 다를까? 나는 나 자신이지만 타인은 나의 투영된 이미지만을 보게 된다, 아니면 내가 그들을 가면을 쓰고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그들에게 보여지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나는 그에 대해 증오밖에 없었으며, 이 증오란 것은 너무도 강렬한 빛을 발사해서 그 속에서는 사물의 윤곽이 사라져버리는 법이다. 중대장은 내게 그저 앙심을 품은 교활한 쥐새끼같이만 보였었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그를 무엇보다, 한 젊은이로, 연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 그리고 연기를 한다.

연기는 힘이든다, 나는 어디 있을까?

나는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럴 만큼 그녀를 갖고 싶었다. 어떻게 내가 그동안 그녀를 만나오면서 그렇게 소심한 학생같이 굴었을까..
그때 나는 그녀를 안을 수만 있다면 그 단 한번의 정사를 위해 모든것을 바쳤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나의 온 존재가 매달린 한 여인에 대한 총체적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고. 그것은 몸과 영혼, 욕망과 다정함, 서글픔과 삶에대한 강렬한 욕구였으며, 위안에 대한 갈구이자 동시에 저속함에 대한 갈구이고, 영원히 소유하고픈 갈망이자 동시에 한순의 쾌락에 대한 갈증이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완전히 다 걸고 있었고, 한곳으로만 향해 있었다. 나는 이 순간들을 잃어버린 낙원으로 기억한다.

인생이 한곳으로 미친듯이 흘러가는 시간은 지나고 나면 그 때야말로 잃어버린 낙원이다.

나는 속으로 루치에에게 오늘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내가 얼마나 온갖 위험을 겪어야 했는지 아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점점 내 안에서 원망과 분노가 말갛게 솟아올라 왔다.분노가 치솟은 진짜 원인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었다. 나 자신의 비참함이 가슴을 도려내듯 아픈 통증을 일으켰던 것이다. 처참하게 망가진 내 젊음, 욕망을 억누르며 보내야 했던 기나긴 나날들, 욕망의 좌절 끝에 오는 이 한없는 굴욕감, 그런 것 들이었다.

그 당시 내 안에는 사막이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사막 속의 사막이었고, 그리고 루치에를 부르고 싶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미친 듯이 그녀의 몸을 탐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내게 그녀는 몸을 지닌 여자 같지 않고, 영원한 겨울의 제국을 가로지르는 투명한 따스함의 기둥, 바로 나 자신이 쫒아버려 내게서 멀어져 가는 투명한 기둥 같이 느껴졌다.

나는 오늘날 자신이 신봉하던 시대의 움직임에 의해 나처럼 거부당하고 떠밀려나간 사람들이 자기 운명을 떠벌이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추방자라는 내 운명을 나 역시 영웅화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자만이었다. 내가 추방된 것은 내가 용감했기 때문도 아니고, 내 생각과 다른 생각들에 대해 투쟁을 한 것도 아니었다. 나의 전락에는 그 어떤 진짜 드라마도 선행된게 아니었다. 나는 내 이야기의 주체라기 보다는 차라리 대상에 가까웠다.

자신의 고난을 씹고 또 씹어라, 단물이 날 때까지,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인가? 내 행동이 나인것인가? 내 의무가 나인것인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유일한 한 사람, 수 많은 패배 이후의 내 최후의 희망 그는 지금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잠들어 있다.
결국 나의 최후의 희망은 내 혈육이자 핏줄인 것인가? 수 많은 패배라...

루치에는 영원한 과거가 되었기 때문에(과거로는 영원히 살아 있고, 현재로서는 이미 죽은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점차로 그녀의 육체적 물질적, 구체적 형태를 잃어갔고, 점점 양피지에 씌어진 어떤 전설이나 신화 같은 것이 되어 조그만 금속 상자에 숨겨져 내 인생의 저 깊은 곳에 놓여졌다.

인간은 혼자서는 용서하지 못하며, 그것은 애초부터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다. 죄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고, 시간을 지워버리고,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을 무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초자연적 행위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법칙을 벗어나시기 때문에, 그분은 자유자재하시므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으시므로, 오직 그분만이 죄를 씻어주실 수 있다. 인간은 신의 죄사함에 의지해서만 인간을 용서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남자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여자와 짝을 이룰 것이며 그 둘은 한 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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