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6일 일요일

[알베르카뮈] 시지프신화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끎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주었다.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다다르면 스스로의 무게로 인하여 다시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지곤 했다. 무용하고 희망없는 노동보다 더 끔직한 형벌은 없다.


그는 왜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을까? 신화에 의하면 여러의견이 분분하나 여기서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어떤 이유로 인해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바위를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다 바쳐야 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돌을 산으로 굴러 올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노력과 정렬을 다 바쳐야 했다 그의 온 몸은 바위를 기대고 있으며 억센 두 다리로 땅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으며 힘겨운 걸음 하나하나에는 돌을 밀어 올리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결국 기나긴 노력의 대가로 돌을 정상에 위치하게 하고는 덧없는 희망을 갖을 것이다. '해냈구나' 허나 바위는 속절없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신의 뜻인것이다. 그는 또다시 돌을 굴러 올려야 한다. 그는 정상에서 산 밑의 바위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다시 옮기게 될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산 아래로 내려 왔을까? 다시 올려봐야 돌은 다시 밑으로 떨어질텐데 혹시 다음번엔 돌이 산 정상에 그대로 머물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 하면서 희망을 얻지는 않았을까?


카뮈는 그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다소 모호한 얘기를 했지만 나는 그 고통이 어떻게 그에게 승리를 완성시킨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에겐 희망이 없었다고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0.001%의 희망이라도 있으면 그 희망에 기대해 모든것을 극복해 내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면서 카뮈는 오이디푸스의 예를 든다. 오이디푸스는 아무런 사실을 모른체 그의 운명대에 복종한다. 그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 모든 비극은 시작된다. 종국에 그는 "내가 판단하노니 만사가 잘되었다" 라고 한다. 인간은 항상 긍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한마디는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인간들끼리 처리할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그가 돌을 산 정상으로 올리는 일 조차 자신의 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시지프는 이야기 할 것이다. "모든것이 잘 되었어"라고 그 한마디로 그의 인생은 그의 것이 되고 그가 스스로 판단해 하게 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들은 침묵하고 인생은 자기것이 되는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살아가는 날의 주인이 되는것이다.


나도 매일 반복되는 일이 힘들게 느껴지고 여기가 지옥이구나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하지만 나에겐 꿈이 있고 이 길은 내 스스로 선택한 일이기에 "내가 판단하노니 만사가 잘 처리 되었다" 라고 감히 말해 본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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